단동인/랩스

적수 (adversary)

978wpql 2024. 5. 21. 17:31

원본-https://www.mythridate.art/lapse/extras/story02-mv.html


"참가자 여러분, 자리에 착석하여 대기해 주십시오. 곧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계적인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난 최고의 인재를 배출한다고 자칭하는 벨럼 아카데미의 대표로서 이곳에 서 있었다. 게다가 이미 크게 칭송받는 학생들의 학교에서, 난 최고 중의 최고였다. 클래스메이트들도 내 능력에 대한 자신이 있었고, 관중석에서 자리를 찾으며 나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매를 펴고 짧은 재킷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주어진 작은 무대에 올라서자, 흥분한 관중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 미시는 긴장한 거 같은데. 연승행진이 오늘에서야 끝나는 건가?"

    누군가가 경기를 돌아보는 걸 우연히 듣고 능숙하게 그쪽으로 돌아봤다...

    "그래, 이런 곳에서 긴장하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그게 이겨야 한다는 명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경기를 위해 세팅된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깔끔하게 잘 정돈된 체스판이 눈앞에 준비되었다.

    서리 내린 듯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세련된 옷차림을 한 학생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몇몇 지역 대회에서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직접 마주해 본 건 처음이었다. 세계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기술이 있는 거라면 강한 상대일 것이다.

    위압적인 아우라를 가진 여자였다. 얼음처럼 푸른 눈, 굳게 앙다문 입술...



    "안녕." 비단결 같은 목소리가 관중들의 웅얼대는 소리 위로 떠올랐다. 그녀가 건넨 장갑 낀 손을 잡아 흔들고 자리에 앉았다.

    "안녕. 전에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만난 적 없지...

    "실례합니다, 아가씨들. 곧 대회가 시작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고 게임 진행자가 옆의 테이블로 이동하는 동안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의 결승전에선 벨럼 아카데미의 미시 베스퍼와 코바인 학원의 달링 브린드-아이보리가 맞붙게 됩니다."

    "너부터 선공하도록 해."

    하얀 말 측에서, 공격할 생각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나이트를 움직임으로서 판도를 이끌었다.

    우리의 대회는 스피드 체스가 아니었지만, 우리의 행동만 보면 마치 그렇게 보였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모든 움직임은 빠른 속도로 읽히고 계산되었다. 몇 초 만에 말들은 사라졌고 판은 비기 시작했다. 우리의 처음 9번의 움직임은 전부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정말 예리한 도전자였다.

    "Np6, 퀸이 잡히기 직전인걸." 숨 아래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순간 퀸의 왕관으로 손을 옮겼고 원래 계획했던 움직임에 안주했다.

    그 순간을 읽은 그녀가 내 퀸을 잡았다. 난 비숍을 잡았다. 그녀가 내 폰을 잡았다. 난 룩을 잡았다.

    깔끔하진 못했지만, 결국엔 회복해냈다.

    잠깐의 실수로, 퀸을 보호하던 것을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킹이 판 위에 남아있는 이상, 이 정도의 손실은 원대한 계획 안에선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빠른 움직임을 보인 후, 우리들은 가라앉은 침묵 속에 판 위를 훑고 있었다. 상대의 차례였지만, 최선의 수를 찾아 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퀸이 잡히고 상대가 판 위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럼 됐나. 멋진 승부였어."

    그녀의 손을 잡고 확고하게 흔들었다.

    "멋진 승부였어."

    "달링의 기권으로, 미시 베스퍼가 전국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되겠습니다."

    군중들이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뭐야- 이렇게 빨리?"

    "미시는 힘든 녀석이니까, 달링이 겁을 먹은 게 분명해!"

    "말도 안 돼. 미시가 돈으로 매수해서 경기를 그만두게 한 걸 거야."

    군중들 사이로 퍼지는 소문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약해서 굴복했다고 생각하다니 다들 어리석네. 베스퍼 씨는 이번 경기에서 아주 강력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난 그 기술을 정중히 인정해.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 싫으니, 기권하기로 정한 거야." 그녀는 팔짱을 끼고 무례한 군중들로부터 머리를 돌렸다. "이런 초보적인 것까지 설명해야 하다니."

    상대는 당황한 학생들을 뒤로 하고 내게 돌아섰고, 작은 미소를 반짝였다.

    관중석의 학생들은 순간 침묵에 빠졌다가 우리들이 무대를 내려올 때쯤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난 그녀가 경기 중에 속삭인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녀 쪽으로 돌았다.

    "네 플레이를 그렇게 말로 하다니 너도 짓궂었네."

    "나도 알아. 하지만 잠깐 당황하는 널 보는 건 재밌었어. 그래도 좋은 회복이었네. 그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심이 내 몰락의 시작이었던 모양인걸?" 그녀는 분개한 척 턱을 두드리며 자신의 최후를 가볍게 비웃었다.

    "뭐, 넌 그 순간의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전쟁에선 아니었지. 작은 승기에 집중하기보단 최종 목표에 집중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녀는 내 말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너 평범한 학생이 아니구나...?"

    "흠...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재밌는걸, 나도 방금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

    대화가 조용해졌다. 우리 둘 모두 먼저 자기소개를 시작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상황을 바라보더니 웃었다. "넌 너무 진지하다니까. 난 너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야."

    "게임 시작 전에 얘기해 준 이름을 들었을 텐데, 브린드-아이보리 씨."

    "네, 베스퍼 씨. 하지만 너에겐... 그 이상의 특별함이 느껴져.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함이 있달까..."

    "내게 붙은 이름표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초고교급 재능을 얘기하는 건가?"

    "아! 그거였네!"

    "나 또한 같은 분야의 사람들을 능가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니까, 느낄 수 있어."

    그녀는 실크 장갑을 벗고 내게 제대로 손을 내밀었다. "난 달링, 초고교급 기사야."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달링의 손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미시 베스퍼. 초고교급 책략가."

    "넌 흥미로운 사람이네, 미시. 너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졌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재밌는걸, 나도 방금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

    돌아서기 전, 그녀는 웃었다.

    "우리의 인연이 다시 한번 교차하기를."

    ...그리고 방을 떠났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초고교급"의 강렬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 또한 느껴졌다.

    난 내 반으로 돌아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